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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전화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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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전화, 휴대폰을 애용하다 보니 집전화 사용이 줄게 되었는데요. 한 때는 집집마다 1대는 기본, 2대 3대까지도 쓰는 가정도 있었지요. 휴대폰 보급이 본격화 되던 때는 온 가족 휴대폰 뒷번호가 모두 유선전화 뒷번호와 맞춰서 동일하곤 했었죠. 언니 오빠가 무선전화기를 들고 방에 들어가서 이성친구와 통화하면 거실에 연결된 유선전화로 엿듣기도 하고, 멋모르고 휴대폰이며 재미있는 전화서비스를 이용하다가 요금이 많이 나와서 엄마에게 혼나기도 했죠. 

집전화를 사용하신 분들은 이렇게 집전화에 얽힌 훈훈한 추억과 감동, 깨가 쏟아지는 재미와 같은 이런저런 기억들을 가지고 있으실 텐데요. 올레에서는 5월 가정의 달을 ‘집전화 스토리 공모전’을 개최하고 사연을 모집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즐겁고 감동적인 사연이 도착하였는데요, 1등 당선작으로 뽑히신 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나와 우리집 집전화

매일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집안 청소입니다. 집안을 쓸고 닦다가 가장 마지막에 하는 일은 거실 문갑 위에 있는 전화기를 닦는 일이지요. 벌써 15년 가까이 쓰고 있는 묵직한 구형 전화기는 아직도 멀리 있는 가족과 이웃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고마운 기계입니다.

우리 집에 처음 전화기를 설치한 것은 제가 처녀일 때인데요. 지금처럼 사람들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시절도 아니고, 집마다 인터넷이 있어서 인터넷으로 화상통화로 외국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시절은 더더욱 아니던 때이니, 전화라고 해봐야 동네 이장님 댁에 한 대 있을까 말까 한 시절, 급하게 전할 말이 있으면 글자수에 따라 돈을 받는 전보를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열일곱에 집을 떠나 도시 공장에서 일하던 나는 어머니 얼굴이 보고 싶고, 동생들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설이나 추석 명절 때야 겨우 고향집에 갈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연휴가 짧고 차비도 아까워서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죠. 그 때는 가족들 목소리라도 자주 듣고 싶었던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화를 놓기 위해서는 쌀 몇 가마에 해당하는 보증금을 냈어야 하는데 시골에서는 전화선을 놓아야 해서 가설비가 더 비싸서 동네 부잣집 아니고서는 개인은 전화를 놓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목소리, 동생들 목소리 자주 듣기 위해 집에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보증금을 내고서라도 전화를 놓아주는 것이 공장에서 일했던 때의 꿈이 되어 일부러 잔업과 특근을 더 했습니다. 남들은 지독하다고 했었지만 그만큼 가족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몇 년을 모아서 드디어 집에 전화기를 놓아드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 어머니는 “우리 형편에 전화는 무슨...”이란 말씀을 하면서도 묵직한 전화기를 깨끗한 면보로 닦으시며 참 좋아하셨죠. 그 때 아마 우리 집이 동네에서 다섯 번째인가로 전화를 가설한 집이었을 것이에요.

그렇게 전화를 놓았지만 시외전화료가 비싸서 맘처럼 집에다가 전화를 자주 걸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짬을 내어서 집에 전화를 걸면 온 가족이 전화기 옆에 모여 기다렸다가 내 전화를 받고는 했습니다. 비싼 요금으로 1초라도 시간을 절약하며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었죠. 하루 종일 농사일로 힘드셨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힘든 것도 모두 잊혀졌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시집을 가고, 동생들도 모두 장성하면서 부모님도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실 무렵 두 분 모두 안타깝게 세상을 뜨셨습니다. 부모님 집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전화를 어떻게 할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동생들은 당연히 내가 그 전화를 가져가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전화는 언니가 부모님께 해 드린 것이니 이제는 언니의 소유라고요. 마침 신혼 집에 전화가 없었기에 그 전화는 내가 집으로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전화기를 이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국번이 새로 정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4국에 330번이던가, 그 전화는 또 다시 타지로 시집간 동생들과의 통화,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남동생과의 통화로 우리 가족을 이어주는 끈이 되었죠.

당시에 남편과 내가 살던 집은 방이 여러 개가 있어서 다른 방들은 군인가족들에게 세를 놓기도 했는데. 우리집 전화는 또 그 군인가족들이 다른 지역에 사는 친정엄마나 시어머니 등과 연락하는 그런 전화가 되기도 했어요.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한반도의 가장 북단인 연천까지 군인 남편을 따라서 온 아내들의 마음이 오죽 했을까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 공장에서 일하면서 부모님 얼굴도 못보고 살지 않았던 나는 남편 따라서 이 멀리까지 온 군인의 아내들에게 전화를 빌려주는 일이 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도 좋지 않고, 통신도 좋지 않던 시절이기에 그녀들은 전화기를 붙들고 친정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내가 그랬듯이 그저 눈물만 흘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시외전화료가 무척이나 비싸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군인아내들을 위해 그런 것은 눈 감아주고는 했어요. 물론 전화요금 고지서가 나올 때 쯤에는 조금은 후회하기도 했지만 말이지요.

수십 년 전, 공장에서 일해서 모은 돈으로 부모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가설했던 전화, 그 전화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가져온 뒤에는 쭈욱 쓰고 있다 보니 어느새 우리집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들 때도 많습니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번호 그대로를 유지하다 보니(그동안 국번이나 체계가 바뀌면서 번호가 약간씩 바뀌기는 했지만...) 재미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지난 겨울. 오랜만에 집전화가 울렸어요. 요즘은 휴대전화로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집전화가 올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아 아침 시간부터 전화가 울려서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며 전화를 받아보았습니다.

“여보세요... 혹시 거기.. 저 예전에 군인 가족들 세 살던 집...”

두서없이 말을 하는데 왠지 우리집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 거신 곳이 연천이 맞나요? 예전에 저희 집에서 군인가족들이 작은 방에 세 살았던 적이 많아요. 그릇가게도 하고 했던 집 찾으시면 저희 집이 맞습니다.”

세상에나, 전화를 건 사람은 34년전쯤, 그러니까 81~82년도에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소위의 아내였습니다. 대학교 재학 중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남편이 임관하면서 대학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전방생활을 시작한 여인이었다. 마산 쪽이 고향이라고 했었는데 친정엄마와 전화하며 유독 많이 울던 사람이었죠. 우리 집에 살던 시절은 2년 남짓, 남편의 부대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간 뒤에 가끔씩 연락하다가 아예 연락이 끊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집 전화번호를 알았어?”

“전화국에 물어봤었어요. 예전 번호가 4국에 330번이었는데, 혹시 이 번호가 바뀐 번호를 알 수 있냐고요. 그랬더니 그 번호를 그대로 쓰고 있다면 이 번호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해봤더니 정말 그대로 쓰고 계셨네요.”

그녀의 남편은 예편하고 가족들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아는 사람도 없는 전방지역으로 남편을 따라왔는데, 친정 언니 같고 친정엄마 같던 내가 참 고마웠고 지금도 기억이 가끔씩 났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오면 한 번 꼭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민가면서도 챙겨서 가져간 앨범 속에 끼워져 있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 번호로 전화국으로 문의를 해서 받은 답변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고요.

내 전화를 받은 그녀는 예전처럼 또 그렇게 울먹였어요. 그리고 한국에 올 때 꼭 찾아오겠노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뒤로 가끔씩 아침에 전화가 울리면 바로 그녀였습니다. 미국에서는 밤인데 나라별로 시간이 다르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에 전화가 울려서 통화하기 딱 맞다고 좋아하면서 꼭 그 시간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작년 겨울 우리집에 들렀어요. 이제 나는 할머니가 되었고, 그녀도 딸이 곧 시집을 가니 곧 할머니가 될 거라네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새댁들이었는데, 이제는 서로 할머니가 되어서 만났다며 또 얼마나 웃고 울었는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가끔씩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합니다. 수십 년간 집전화를 바꾸지 않고 써왔기에 이토록 오랜 인연을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아직도 그 전화번호를 쓰냐며 놀라워했는데, 전화에 얽힌 사연을 말해주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도 집전화를 바꾸거나 해지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인연이 나를 기억해서 이 번호로 전화를 줄지도 모르니까요. 

요즘엔 우리 손자들과 전화로 통화하는 것이 또 하나의 큰 즐거움입니다. 아직 휴대폰이 없는 6~7살짜리 손자손녀들이 집전화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다 보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끝날 시간이면 집전화를 바라보며 언제쯤 손자손녀들이 전화를 걸까 기다려집니다. 나중에 이 집전화를 저 아이들 중 하나가 이어서 사용해주기를 바라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수십 년간 같은 번호를 쓰시며, 인생을 함께하고 있는 분의 감동적인 사연이었습니다. 유행에 따라 쉽게 휴대폰을 바꾸고 필요에 따라 번호를 바꾸는 요즘 우리는 같은 추억을 만들지는 못해도 깊은 공감과 감동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같은 번호로 집전화를 쓰고, 또 가족들 누군가가 이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집전화를 인생의 긴 동반자로서 대하신 것은 아니었을 까요. 오늘 우리도 집전화 한 통 걸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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